우토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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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04-03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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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교육을 받는 일도 쉽지 않았습니다. 6000평(21,000평방미터) 가량의 면적에 1300여명의 조선인이 살았던 우토로는 처음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폐품회수업이나 공사판에서 일하면서 연명하였습니다. 1988년까지 우물물로 생활하는 差別과 극빈 생활 속에서도 이들은 Japan 국적 취득을 거부하고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60년 이상을 우토로에 살아온 것입니…(투비컨티뉴드 )
순서
다. 이러한 우토로에 대한 내용 중 우토로 마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글입니다. 여건이 허락하는 때에 곧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품고서. Japan 정부와 기업은 전후보상은커녕 최소한의 인도적인 배려도 없이 이들을 방치했습니다.
1945년 Japan이 패배하자 비행장 건설은 중단되었고 이들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러한 우토로에 대한 내용 중 우토로 마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글입니다.우토로마을 , 우토로 마을인문사회레포트 ,
일제강점기 전쟁준비에 날뛰던 군국주의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日本(일본) 교토(京都)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강제징용자와 그 후손들의 아픔이 알려져 각계 인사들을 눈물겹게 하더니 드디어 “역사청산! 거주권 보장!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되었습니다. Japan 사회의 극심한 差別 속에서 조선인이 취업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강제징용으로 Japan으로 끌려왔다가 우토로로 흘러 들어온 사람, Japan군 징용을 피할 수 있다고 해서 노무를 선택한 사람, 큰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거짓 선전으로 이주해 온 사람 등. 요컨대 총칼 앞에서 강제 징용 당하거나, 논밭을 빼앗기는 등 생계수단을 빼앗겨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도일해온 사람들입니다. 민족학교는 Japan 정부의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1949년 폐쇄되고 말았습니다.
일제의 식민인 조선인들이 조국을 떠나 우토로에 들어오게 된 경위는 다양합니다. 많은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안고 자비로 Japan을 빠져나갔지만, 조국에 친척도 집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던 사람들, 배 삯을 구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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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인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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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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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Ⅱ. 우토로에 대하여
1. 마을의 형성
2. 토지문제의 경위
3. 우토로 연표
4. 유엔의 권고
5. 재일 한국인의 역싸
Ⅲ. 우토로가 바라는 점
1. 우토로의 호소
2. 주민의 목소리
Ⅳ. 우토로마을 대책present condition
1. UN·국제市民단체들, 한 목소리로 우려 표명
2. 우토로 재일조선인의 권리 찾기를 위한 국제 연대성명
3. 국회의원들의 우토로 현지답사
Ⅴ. 結論
-이젠 조국의 힘을 빌릴 때가 되었다
Ⅱ. 우토로에 대하여
1. 마을의 형성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51번지, 이 곳이 재일조선인 부락으로 형성된 것은 1941년 제2차세계대전 중 교토 군비행장 건설을 위해 Japan 정부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한바(노동자가 집단으로 합숙하던 가건물)를 만들어 생활하면서부터입니다.일제강점기 전쟁준비에 날뛰던 군국주의자들에게 강제로 끌려가 일본 교토(京都) 비행장 건설에 동원됐던 강제징용자와 그 후손들의 아픔이 알려져 각계 인사들을 눈물겹게 하더니 드디어 “역사청산! 거주권 보장! 우토로 국제대책회의”가 결성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언젠가는 조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손꼽으며 자신들의 역싸와 글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을 한 가운데 조그마한 학교를 짓기도 하였습니다.